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라델피아 필리스/역사 (문단 편집) == 1918년~1948년 == 1918년 팀의 전력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던 [[그로버 알렉산더]]의 연봉을 올려주기 싫었던 구단주는 그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하였고, 이후 팀은 무지막지한 침체기에 빠진다.[* 옆 리그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만악의 근원 해리 프레이지가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팔아제낀 [[보스턴 레드삭스]]가 빵셔틀이 되었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 거두절미하고 1918년부터 1948년까지 31년동안의 순위를 정렬하면 '''68887-87688-85864-77787-88888-788576'''[* 4위 1회, 5위 2회, 6위 4회, 7위 8회, 8위 16회로 순위가 내려갈수록 확률은 정확히 2배씩 올라가는 [[급수(수학)|아름다운]](...)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이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카고 컵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 나름 엄청나게 긴 암흑기를 보낸 구단도 '''이 앞에서는 세 수는 접고 들어간다.''' 도합 17번의 리그 최하위[* 8의 개수는 16개지만 1947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공동 최하위를 기록해 7이 찍혀 있다.]를 기록하였으며, 12번의 세자리수 패배, '''전 세계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5년 연속 세자리수 패배'''[* 1938~1942] 및 5번의 2할대 승률을 기록하였다.[* 1928, 1939, 1941, 1942, 1945. 정확히 3할을 기록한 1938년도 있다.] 이 기간동안 최고 승률이 1932년의 0.506이다. '''절대로 평균 승률이 아니다. 최고 승률이다.''' 그리고 나머지 시즌은 전부 5할 미만을 기록하였다. 즉 14년연속 5할 미만 승률을 기록하고 한 번 턱걸이 위닝시즌을 하자마자 또 16년 연속 5할 미만 승률을 기록하였다. 또 이 기간동안 평균 승률은 0.373이고 승패마진이 -1000을 넘는다. 롯데 자이언츠가 8888577을 기록한 7년간의 승률이 0.391인 것을 감안하면 이 기간 필리스의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단번에 체감할 수 있다. 1930년에는 '''팀 방어율 6.71'''을 기록. 이는 역시 메이저리그 최악의 기록이다. [* 다만 이때는 라이브볼 초창기로, 극심한 타고투저였으며 당시 필리스의 홈구장 역시 극악의 타자구장이었다. 그래서 조정기록으로는 의외로 최하위랑 거리가 먼 편이다.] 팀이 이 정도로 바닥을 친 데에는 짠돌이 구단주였던 윌리엄 베이커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페이롤 제도나 폐쇄적인 드래프트 제도(하위권 팀이 우선지명을 하는 방식)가 정착된 현대 미국 스포츠리그에서는 수십 년동안 [[시애틀 매리너스|단순히 포스트시즌을 못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최하위만 도맡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장 무능한 프런트진으로 유명한 [[롯데 자이언츠]]도 [[8888577|7년간 바닥을 기다]] 8년째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다만 필리스가 바닥을 긁던 이 시기에는 페이롤 제도나 드래프트가 없었고 마이너리그도 없었던 시절이라 꼴찌만 도맡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구단주가 돈을 안 쓰니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이 될 리가 없고 전력이 계속 약할 수밖에.] 우선 팀의 에이스인 [[그로버 알렉산더]]를 연봉이 올려주기 싫다고 보내버렸고, 바닥친 성적 때문에 관중석이 비어버리자 응원석에서 양을 키우는 기행을 저질렀다. 서브컬쳐에서는 필리스를 떠난 선수가 필리스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이 이상했다. 그가 1930년 사망한 이후 부인과 비서에게 구단이 상속됐고, 부인이 경영을 맡았으나 베이커의 아내조차도 2년만에 사망해 비서의 남편 제럴드 누젠트에게 구단이 넘어갔다. 갑자기 구단주가 된 누젠트는 팀 운영에 소홀했고, 이에 따라 1942년까지 팀은 여전히 하위권이었다. 5년 연속 세자리수 패배를 기록한 것도 이 구단주의 재임기간으로, 베이커 시절보다도 더욱 부진한 성적을 냈다. 1943년에는 대학 야구선수 출신인 제재업 브로커 윌리엄 콕스에게 넘어갔고, 1945년까지는 아주 잠깐 [[토론토 블루제이스|Blue jay]]를 로고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콕스는 1943년 [[버키 해리스]] 감독과 갈등 끝에 그를 해고했고, 이에 빡친 버키 감독이 팀을 가지고 도박질을 한 사실을 폭로하자 콕스 구단주는 사업가 R.R.M. 카펜터 주니어에게 팀을 팔았다. [* [[1950년 월드 시리즈]] 진출 때도 카펜터 주니어가 구단주였다.] 이 와중에 팀의 타선을 혼자서 이끌었던 선수가 바로 [[척 클라인]]이다. [[척 클라인]]은 위에서 언급한 윌리엄 베이커가 재임기간동안 '''유일하게''' 스카우트한 선수로, 1928년에 데뷔하여 1929년 홈런왕, 1930년에는 타격왕을 기록하였고 1932년에는 현재까지 유이한 기록[* [[타이 콥]]도 1909년에 홈런왕 도루왕을 석권한 적이 있다(9홈런-76도루).]인 홈런왕과 도루왕을 동시 석권하여 NL MVP를 수상하였다. 다음 해인 1933년에는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하였지만 팀 성적이 7위로 떨어지자 결국 리빌딩을 위해 컨텐더팀이었던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후에 다시 필리스로 돌아왔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다.[* 그래도 필라델피아의 암흑기에 혼자서 다 해먹었으므로 필라델피아 구단에서는 영구결번 급 대우를 해주고 있고 1980년 베테랑 위원회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기의 막바지인 1947년에는 최악의 흑역사를 만들어낸다. 당시 팀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밴 채프먼이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공개적으로 [[재키 로빈슨]]에게 굴욕을 준 것.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방망이 악수 사건이다. 이 시기의 팀 성적에 대해서는 워낙 오래 전이라 언급도 없지만 [* 범접할 수 없는 극악의 암흑기임에도 [[비밀번호(스포츠)]]에 내용조차 없었다] 이 일화는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그야말로 구단 역사 상 최악의 흑역사이다. 사실 현대 미국에서 인종 문제가 얼마나 무겁고 심각한 주제이고, 이와 연관된 재키 로빈슨이 얼마나 위인으로 추앙받는지 고려하면 악성 팬덤이나 만패의 역사는 그냥 필리건 본인들도 자조적으로 웃음거리로 삼는 주재지만, 그냥 전형적인 위인전에 나오는 악당 역할을 했던 당시 필라델피아와 채프먼의 태도는 진짜 아무도 언급하지도 않고,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흑역사이다. 차라리 필라델피아가 예나지금이나 인종차별적 태도로 악명 높은 전형적인 남부 지방 동네였다면 몰라, 크게 보면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역사적으로 일대 퀘이커교도들과 노예해방론자들 중심으로 노예 탈출 네트워크인 지하열차 (Underground Railroad) 망의 중심지였으며, 해방 이후 나름 사회적 상승도 이룬 흑인 중산층도 당시 미국 기준에선 나름 반인종차별 운동의 역사가 깊으며 이걸 또 자랑스러워하던 도시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